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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대대리는 예로부터 한터, 무량골, 또는 사기점골이라고 불리었다.  특히 사기점골이란 이름은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신자들이 이곳 깊은 산속에 숨어서 사기를 구우며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 바오로 주교는 1925년 아버지(김병희 비리버)와 어머니(방 아가다)사이에서 2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가 공소회장이어서 그의 집은 이 마을의 공소였고, 동네신자들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 성전이었다.

    그가 너 댓살 때쯤의 일이다. 그는 미사가 시작되면 으례히 맨 앞자리에서 뚫어지게 미사의 광경을 지켜보았고 미사가 끝나면 제의 대신 혼자 담요를 덮어쓰고 밥상앞에서 미사드리는 모습을 흉내내곤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가 갖게된 사제의 꿈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미사 복사를 시작했고, 아침일찍 집을 나서 상당히 먼 거리를 걸어서 새벽미사에 임했다. 특히 몹시 추운겨울에는 깨진 사기조각에 불씨를 담아 손을 녹이며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복사생활을 하였다.

그는 유독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며 어머니와 아들은 함께 기도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여 조과와 만과 기도를 나란히 앉아 바치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에게 일찍이 사제성소의 꿈을 키워주신 분 또한 그의 곁에서 늘 다독이시며 든든히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신 어머니의 사랑이 숨은 씨앗이라고 한다.

    그는 1942년 서울 신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태평양전쟁이 터져 덕원에서 신학교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덕원신학교와 용산에 있던 소신학교, 혜화동에 있는 성신대학을 두루 거쳐 1950년 4월 성신대학 철학과를 수료하던 해에 6.25 사변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후 개성과 평양을 거쳐 평양근처 만경대에서 군생활을 하던 중 1.4후퇴를 맞아 대구로 가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불란서 유학을 가게 되어 릴(Lille)신학교에서 1954년 신학교를 졸업하며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서품후 계속하여 릴(Lille)가톨릭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59년에 동대학원 신문학과를 마치고 귀국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인생의 여든을 넘어 어느덧 사제서품 54주년, 주교서품 23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지내온 그는 모든 순간이 결코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 오로지 많은 이웃들의 사랑을 통한 성령의 은총과 하느님 섭리 안에서의 삶이었음을 절실히 느낀다고 회고한다.

    위의 사진은 불란서에서 1954년 서품받기전에 한 수도사제와 함께 불란서 국경지대에서부터 만 열하루를 걸어서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도보성지순례를 하며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다.

<야훼께서 한번 맹세하셨으니 취소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키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Ps.110.4)>